종친회/정국군총회

親日反逆者 박춘금 [朴春琴] 과 밀성재 [密城齋]

조전 2011. 7. 4. 09:47

親日反逆者 박춘금 [朴春琴] 과 밀성재 [密城齋]

. 生涯

初年期

1891년 4월 17일, 경남 밀양시 삼문동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천자문을 읽었을 뿐 무학이다. 1905년 경상북도 대구의 병영에서 급사를 지냈다.

日本으로 이주

1907년 8월경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베 등지에서 고용살이, 자전거 직공, 탄광갱부, 토목 노무자 등등 육체노동으로 전전하면서 일본말을 배우고 거물 폭력배로 성장해 나고야에서 조선인삼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1917년 5월 나고야조선인 회장에 취임했다. 이 당시 흑룡회 계열의 폭력배 거두 도야마 미쓰루(일본어: 頭山滿)라는 지우를 얻고, 1920년 도쿄에서 이기동 등과 더불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동경에서 상애(相愛)·공존공영 정신에 입각한 일선융화를 표방하면서 노동단체 '상구회'(相救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취임한 뒤, 이를 1921년 사회사업단체(실제로는 폭력조직이었다.)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다.[1] 이 단체는 재일조선인 노무자의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경보(警保) 당국과 총독부 등이 사주, 후원하여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애회는 조선인 노무자의 교화·구제를 위하여 직업소개, 인사 상담, 공동숙박소 건설 등을 사업으로 표방했으나,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노무자를 학대, 압박한 폭력 착취단체였다.

깡패 활동

1922년 5월 이기동이 설립한 '일선기업 주식회사의 상무취채역에 선임되었다. 1923년 9월 1일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사건이 가라앉을 무렵 그는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된 노동 봉사대를 결성하고, 경시총감 아카치(赤池濃)와의 연락 하에 시체처리와 조선인 노무자의 색출 및 수용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당국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전 일본적 조직확대의 기반을 잡아 1928년에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충하고, 전직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재단이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한편, 그는 조직을 조선에까지 확대하여, 1924년 4월 지부격인 노동상애회를 서울에 조직하였다. 《동아일보》가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각파유지연맹, 깡패조직등을 비난하자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각각 납치, 폭행하였으며, 1924년 7월의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도 상애회원으로 하여금 농민층 청년회를 습격하게 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지주인 도쿠다의 요청으로 하의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게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일본과 국내로 오가며 활동하면서 노동쟁의, 소작쟁의, 반일운동 등 집회가 있을 때 마다 깡패들을 동원하면서 탄압하는데 크게 앞장섰다.

제국의회 정치깡패 활동

노동자,농민들의 소작쟁의,노동쟁의 등 반일사상을 크게 탄압하고 일선융화를 적극 지지하는 등 활동하여 일본 당국으로부터 높은 환심을 샀다. 이러한 깡패조직 폭력적 기반 위에서 1932년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4년간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다 1936년에는 낙선했다가 1940년 4월과 1942년 총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일본 제국의회중의원을 역임하였다. 박춘금은 일본 중의원에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줄 의사가 없느냐",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의사가 없는가" 등을 질문하는 등 중의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으로 드나들면서 춘만광산(春滿鑛山) 등 이권사업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중일전쟁 이후 ‘동양평화를 위하여’ 등의 연제로 황민화 시국강연을 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야마토동맹(大和同盟)을 조직,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시간극복대강연회(時艱克服大講演會) 등을 주최하여 필승사상을 고취하였다.

1945년 2월에는 '美英격멸','내선단결','생전필승'을 구호로 내걸고 대의당을 조직했다. 대의당 조직에는 군,관료와 친일세력들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 정권이었던 중국 난징 괴뢰정부만주국의 대표 등도 연사로 참석했다.

그가 당수로 있던 대의당은 광복 50일 전인 1945년 6월 24일에 결성된 단체로, 항일·반전(反戰) 사상의 격파를 목적한 폭력단체로 전해지고 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에 이 단체가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는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 등 세 청년이 장치한 폭탄이 터져 마지막 항일 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 조직이 결성되었고, 1949년 7월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해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과 GHQ 사령부에 체포하여 강제 국내송환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민특위이승만 정부에 의해 와해되고 해산되어 박춘금은 일본에서 평생 동안 기거하게 된다. 이후 박춘금은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1973년 3월 31일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死後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 묘소 바로 밑에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 하지만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박춘금의 무덤 옆에 송덕비를 세웠다. 경남 밀양시 교동 900번지 천주교밀양성당 아래 산 중턱에 박춘금의 묘소가 있다.

경남 밀양지역 시민들 및 문화단체 관계자들은 친일부역자이자 정치깡패인 박춘금의 송덕비와 묘를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2002년 박춘금의 송덕비와 묘는 파묘되어 철거되었다.[2][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나.  교리할아버지와 박춘금의 대립 및 만운재 건립

 

 구한말 밀성박씨 종파인 은산군파의 밀양 초동 문중에서 태어난 박춘금은 대구의 박중양[일명 박작대기]과 함께 우리 박씨에게 치욕을 준 친일반역자의 거두로서 당시 교리 할아버지와 밀성대군 단소를 건립하는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 밀성 박씨의 종파의 일원 및 친일 거두로서 그가 주도하여 밀양 읍내에 단소를 건립코자 하였으나 교리 할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성스러운 일을 친일반역자가 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당시에 가장 명망이 높았었던 자신의 위상과 재력등으로 전국의 밀성 박씨들에게 호소한 바 박춘금이 속한 종파인 은산파와 행산파를 제외하고[은.행산파의 지파인 우당공파와 졸달공파도 교리 할아버지에 동조]전국의 밀성 박씨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속에 경덕단 및 만운재를 밀양군 무안리에 1925년10월18일 준공하여 우리 밀양 박씨의 시조이신 밀성대군과 아드님[욱], 그리고 손자님[란] 삼위를 모시게 되었다. 이에  시조님을 모신 경덕단의 소유권은 참여한 16개파 명의로 하였으며 재사인 만운재와 상당량의 위토답은 박만운재[가명]명의로 하였음. 당시 단소 건립과 관련하여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과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린 과정에서 제파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소유권자 16인중에는 실제적으로 별다른 출연 사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의인으로 등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교리할아버지의 반대편에 섰던 은산파와 행산파를 고립시키고자 한 사실 등은 여러 곳에서 엿보이며 따라서 그 후 우리 정국군파와 은.행산파와는 별로 좋지 못한 관계가 형성되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실정이었음. 이후 만운재는 교리할아버지 생전에는 구름 같은 8도의 성손들이 향사에 참여하여 우리 정국군파의 명예와 긍지를 고취하여 왔으나 그 후 일제에 저항하였던 우리 정국군파의 몰락과 더불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

 한편 일제하에서 친일 반역자의 거두가 되어 승승 장구하였던 박춘금과 그의 은.행산파는 온갖 영광을 다하는 위치가 되어 해방 정국을 맞아 박춘금은 민족의 심판대에 올랐으나 정권욕에 눈이 멀었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친일반역자들과 결탁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여 친일반역자 중 한사람도 처벌을 받지 않은 즉, 민족정기가 한없이 훼손되어 그 후 친일반역자와 그 후손들이 주도하는 나라가 되어버렸으니 과연 세상에 이러한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전부 청산하였고 중국[중공] 또한 괴뢰정부 만주국에 부역하였던 자들을 청산하였다]. 그리하여 은.행산파는 그들이 좌절했던 밀성대군 단소 재 건립에 나서 그들이 밀성박씨의 종파임을 내세우고 그동안 쌓아온 경제적 잇점을 활용하여[밀양의 유성모직, 부산의 조양상선 그룹 협조 등] 만운재 건립 후 53년만인 1978년에 밀양읍 내일동에 소위 밀성재를 건립하게 되었다.

 

다.  만운재의 운영경과

 

 교리할아버지 사후 만운재는 급격히 향사 참여자수의 감소를 가져왔다. 이러한 관계는 교리할아버지의  영향력에 크게 기인 하였던 바도 있었지만 운영상의 문제점 또한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원래 만운재는 교리할아버지께서 거의 전적으로 헌성하신 위토답 등으로 많은 종물이 존재하였던바 당두 문중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 후 정국군파 내에서도 당두에서 타 문중이 참여하는 자체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아 차차 타 문중은 만운재에 소원하게 되었으며 후일 소외된 문중 일부는 뒤에 건립된 밀성재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당두 문중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수호에 많은 노고도 있었지만 반면에 운영상의 문제점 등으로 당두 문중 자체에서 조차도 버림을 받아 경초재가 붕괴되는 등

건물의 유지가 심각할 정도가 되었음은 물론 향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집사 수도 모자랄 정도로 참여가 저조하여 일대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전 유사의 노력으로 문화재에 등록하여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 형편임.

 

라.  밀성재의 상황

 

 해방 후 우리 밀성박씨의 주손인 은. 행산파는 그들의 위상을 회복코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 마침내 1978년 밀양시내에 밀성재를 건립하고 대대적인 홍보를 펼친 결과 전국에서 박씨 성을 가진자 중에서 본관을 잃으면 밀양 박씨가 되는것처럼 밀양박씨 성을 가진 밥술께나 먹는 전국의 박씨들이 모여들어 족보도 없는 자들 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는 의도 등으로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 정국군파에서도 만운재로부터 그동안 소외 받았던 측이나 또다른 의도 등으로 밀성재에 참여하는 분들이 늘어갔다. 즉 ㅇ杓씨 같은 분은 초헌관을 지낸 후 밀성재 회장에 입후보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신바 있고 志ㅇ씨는 우리 정국군파 향사에는 일체 나타나지 않으면서 대종회의 허락도 없이 우리 정국군파 대표를 자칭하며 밀성재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심지어 당두 문중원 중에서도 참여자가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우리 정국군파 향사에 참여하면서 개인자격으로 밀성재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정국군파 향사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 밀성재에 간부직을 맡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행위로 규탄한다.

 

. 만운재와 밀성재에 대한 밀양 유림 및 밀양시의 의견 [종합]

 

 한 할아버지[密城大君]를 두고 양측이 지금까지 벌려왔던 일들에 대하여 밀양 유림과 밀양시 당국의 의견은 양측의 단일화를 적극 권유하여 이에 따라 우리 정국군파도 전향적인 자세로 춘.추향을 나누어 맡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으나 밀성재 측의 거부로 현재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며 따라서 지금까지 혼선을 벌려왔던 관계 정립을 위한 대종회 차원의 의견 정립이 필수적이라 생각되며 무엇보다도 숭고하신 교리할아버지의 뜻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양측의 원만한 협의를 추진하는 것이 대승적 견지에서 꼭 필요할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정국군파가 내부적으로는 단합과 실력 배양에 더욱 충일하여 대외적인 위상 강화에 더욱 노력하여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본의 아니게 일부 일가분들을 거론한 점은 널리 양해바랍니다]

'종친회 > 정국군총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정기총회1  (0) 2012.05.26
2011년임원회의(2011.12.03)  (0) 2011.12.04
2011년 총회시 오락(6)  (0) 2011.05.22
2011년 총회시 오락(5)  (0) 2011.05.22
2011년 총회시 오락(4)  (0) 201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