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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氏朝鮮의 聖君

조전 2011. 7. 21. 18:56

     李氏朝鮮의 聖君

 

 이씨조선 500년을 통하여 가장 훌륭한 성군을 꼽는다면 일반적으로 전반기의 世宗大王 후반기의 正祖大王을 주저하지 않는다.

분의 성군은 자신의 높은 학식과 넓은 국량으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지도자들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분들 에게는 공통적으로 훌륭한 신하가 함께하였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빠뜨릴 수가 없는 실정이다.

먼저 세종대왕에게는 황희[黃喜]정승이라는 名臣이 있었으니 그는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으며, 또한 유능한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을 두었으니. 그는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 과학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 편 정조대왕에게는 명정승으로 바로 채제공[蔡濟恭]을 들 수 있다. 영조 52년의 긴긴 통치기간은 물론, 정조 시대의 전반까지만 해도 조선은 老論의 전성시대로 南人이나 다른 당파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더구나 영조 말엽에는 노론 중에서도 벽파들이 완전히 정권을 쥐락펴락하면서 국정을 농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런 어려운 때에 채제공은 외롭고 고독한 남인으로 고관대작을 역임하며 벽파들의 독주를 견제하고, 정도(正道)의 정치를 펴려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임금을 바르게 보필했던 정치지도자였다 “번암 채제공 정승은 지위가 參判에 이르렀을 때에도 어버이를 섬기면서 천한 일을 몸소 하였다. 都承旨로 있을 때에 조정에서 돌아오면 바로 조복(朝服)을 벗고 땔감을 안고 가서 아버님의 방에 손수 불을 때셨는데 그렇게 손수 하지 않으면 구들장의 차고 따뜻함이 알맞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示二子家誡)라고 하여 채제공의 효성스러운 어버이 섬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과학자로는 茶山 丁若鏞이다..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고 의학서인 마과회통 등을 저술하였다.

  두분 聖君 모두 학문 연구에 진력하여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위대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정조대왕은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예부흥시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분이 집권하는 과정에서는 주변 상황이 너무나 판이하였다. 세종대왕은 전임 태종 이방원이 정지작업을 완벽하게 관계로 왕위에 오르는데 아주 순탄한 과정을 겪은 비해 정조대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세력이 건재한 가운데 목숨마저 위태로운 환경에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은 후임 세종이 즉위하는데 장애물이 요소를 사전에 철저히 제거하였다. 먼저 外戚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하여 1 왕자의 난에 공신인 원경왕후의 동생[자신의 처남] 민무질 4형제를 죽여 민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청송 심씨(昭憲王后 靑松 沈氏) 친정아버지 領議政 沈溫까지 죽여버렸다. 이때 심온이 죽으면서 당시 左議政이었던 박은[朴訔] 사주한 것으로 알고 이후 자손들에게 朴氏[반남박씨]와는 자손들이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600년의 원한 사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집권한 세종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정조는 노론의 위험속에서 전임 祖父인 英祖로부터 왕권을 이어받아 번의 위험을 측근 홍국영의 도움과 일정부분 노론과의 타협을 통하여 개혁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집권 노론에 맞서 채제공을 비롯한 근기 남인 일부를 기용한 까닭에 남인의 본고장인 경상도에는 채제공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정조는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지어 집권 노론에 맞서 일반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특히, 철옹성 같은 노론세력을 깨뜨리기 위해 천도를 위해 수원 화성을 건설하였으나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아 조선의 마지막 개혁의 기회가 끝나고 말았다.

 굳이 분의 단점을 지적한다면 세종은 비록 병약하였으나 왕손을 많이 생산한 점은 긍정적이었으나 아들인 수양대군의 기를 너무 살려준 결과 후일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됨으로써 이씨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에 배치된 희한한 나라가 되고 말았으며, 정조는 반대로 여색을 지극히 멀리하여 왕손이 귀해 후일 증손 헌종이 죽자 자손이 절손되어 부득이 강화도령[철종] 옹립함으로써 안동 김씨들에 의한 세도정치가 더욱 문란해져 國亡에 이르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끝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 백년대개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산아제한정책 때문에 앞으로 인구의 감소로 나라가 망할 절대절망적인 위치에 있다. 인구문제야 말로 가장 국가존립의 필수요소임을 감안하여 우리 정국군파도 국가시책에 적극 협조하면서 문중 존립을 위해 多産하는 자손들에게 포상하는 방안을 강구함도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