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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호시비

조전 2011. 7. 27. 08:19

병호시비 [屛虎是非]

 

 우리역사상 가장 福 많은 어른은 退溪 李滉 先生이시다. 누대에 걸쳐 수많은 제자들을 탄생시켰으니 이보다 더 축복받은 일이 더 있겠는가. 우리 영남일원은 물론이고 전라도[海南 尹氏 등]와 경기도 일원[近畿, 또는 京南이라고 부르는 學派] 및 일본 미국 중국에도 추종하는 학자들이 많았으니………..

 퇴게학맥의 首門은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한강 정구[일부에서는 월천 대신 여헌 장현광을 합쳐 4賢이라고도 부른다]이라 할 수 있는데 각 학파가 지닌 개략적 특징은 서애 류성룡파는 반대세력인 西人과도 통하는 온건합리적인 면이 엿보이며, 학봉 김성일파는 중도적 성향을 보이고 무엇보다 이 학맥에서 경당 장흥효, 밀암 이재,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정재 유치명으로 이어져 퇴계학맥의 正統을 이루었으며, 월천 조목학파는 상당히 강편파로서 慶尙右道[현재의 경상남도]를 근거지로 하였던 南冥 曹植 문하의 북인세력과의 유대관계로 월천이 도산서원에 從享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仁祖反正으로 북인세력이 몰락하면서 명맥이 다하였고, 성주 출신의 한강은 지리적 영향으로 남명과 퇴계 兩門을 출입하였으나 남명학파의 몰락과 더불어 퇴계학파에 흡수되었으며 특징은 근기남인의 開山祖인 미수 허목의 영향으로 禮學的이라 할 수 있고 특히 實學者 성호 이익 및 녹암 권철신등의 西學[天主敎]이 태동된 점이 특이하다.

 이 중에서 퇴계학맥의 가장 중추적인 양 학맥인 안동의 서애학파와 학봉학파가 오랜 세월을 두고 암투를 벌린 사건이 바로 병호시비이다.  이러한 병호시비의 경과를 뒤돌아보면

                                                          이황의 제자들은 1573년(선조 6년) 당시 안동군 월곡면 도봉리에 虎溪書院을 세워 이황, 김성일, 류성룡을 배향하였다. 그런데 이황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조정에서의 순서가 영의정 다음에 좌의정, 우의정의 차례이듯이 좀 더 서열이 높은 분을 왼쪽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문에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제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서애 류성룡 쪽에서는 벼슬로서는 영의정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김성일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단순히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라는 안동의 명문 사족간의 세력 견줌이기도 했다.

 

양쪽의 주장과 세가 팽팽히 맞서 결말이 나지 않자 당시 상주에 있던 우복 정경세에게 판단을 물었는데, 그가 서애 쪽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류성룡을 왼쪽에 모시라고 했다. 시비는 여기에서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세월을 넘어서 다시 이어졌다.

 

1805년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김성일, 류성룡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 4~1637) 네 분을 종사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려는데,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이 때 나이 순으로 학봉이 앞에 오르니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 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이 건 자체를 기각해버렸고 네 분의 문묘 종사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억울하게 문묘 종사의 길이 막혀버린 정구와 장현광의 제자들이 두 분을 따로 대구의 이강서원에 모실 것을 결정하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이 때 통문의 작성이 학봉 쪽이었던지 이번에도 학봉을 앞에 거명하니 서애파는 다시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200여년 간에 걸쳐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되자, 결국 서애파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서애를 병산서원에 따로 모셔가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갈라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시비라고 해서 '병호시비(屛虎是非)'라고 부른다. 그 뒤 모실 분을 잃어버린 호계서원은 사당 없이 강당만 남았다가, 안동댐 건설로 서원 자리가 수몰되게 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겨가 버렸다.

 

 이러한 병호시비도 한마디로 우리 한민족의 전형적인 분열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분열상을 겪는 과정에서는 반대당이었던 西人[老論]들이 영남서얼[庶孼]들을 사주하여 조직화 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병호시비로 남인들이 분열한 틈을 이용하여 1702년 상주에 흥암서원을 건립하여 송준길을 모셨으며 1719년에는 경주에 인산서원을 건립하여 송시열을 모셨고, 1738년에는 안동에 김상헌 서원을 건립하는 등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퇴계학단의 분열로 이조시대 최고의 사당[祠堂:Shrine]인 문묘[文廟]에 西人들이 李珥, 成渾, 趙憲, 金長生, 金集, 宋時烈, 宋浚吉, 朴世采[少論, 반남박씨] 등이 배향되는 동안 남인은 한 분도 종사되지 못하였으니 그 얼마나 한스러운 일이었는가?. 더구나 김장생과 김집은 광산김씨 부자간이고 송시렬과 송준길은 은진송씨 집안간인데 모든 영예를 송두리째 넘겨주고 영남 남인들이 萬年 野黨의 길을 가고 말았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지난 2009년 안동시 임하면에 호계서원 사당 복원사업을 신청하면서 양문중의 宗孫이 퇴계 선생 왼편에 서애, 오른편에 학봉을 봉안하기로 합의하여 400여년간 이어져온 반목과 대립이 드디어 그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大事에는 반드시 상대방을 배려하고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뒤따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과 함께 우리 영남 儒學史에 큰 오점을 남긴 사실로서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한국의 명현으로서 문묘에 봉안된 순위는 高宗 때까지 합하여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유(安裕:安珦)·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김인후(金麟厚)·조헌(趙憲)·김집(金集) 19명이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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