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정국군총회

신남서원

조전 2007. 7. 1. 18:48

신남 서원(莘南 書院: 박위 장군 영정이 있음)

 

 

 

 

 

 

 

 

 

 

위치: 밀양시 무안면 정곡(鼎谷)리

경상남도지정 문화재 자료 256호

관리주체: 밀양박씨

자료협조: 박종식(朴鍾軾)

연락처: 055-352-9173, 016-351-9173

 자료제공: 밀성재,  밀양시청:internet에서 발췌

 박위장군 계보

 

 

 

 

 

 

박위 장군 영정

 

 

 

 

 

 

 

 

 

 신도비(神道碑)

 

경보당(景報堂)현판

 

상모사(尙慕祠)

 

신남서원(莘南書院)

 

 동참 하여주신 일가님들

1. 고려. 조선 문신. 우달적(于達赤)으로 등용, 김해 부사(金海 府使)에 올라 고려 말에 극성했던  왜구를 격퇴한 무관으로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崔瑩)을 몰아낸 후,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 都巡問使: 외관적으로 주. 부의 장관을 겸함)가 되아 쓰시마를 공격해 전선 3백여 척을 불태웠으며 뒷날 이성계와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그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면서 충신이 되었다.

2.무안면 정곡리(鼎谷里)에 있는 신남서원(辛南書院)은 고려말에 대마도(對馬島)정벌(征伐)은 물론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공이 컸던 정국군(靖國君)박위(朴威) 장군과 조선초 문신(文臣)인 소총재(小塚齋)박기(朴耆)부자를 향사(享祀)하는 서원이다.
순조22년(1822년)에 후손인 박성기(朴聖基)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론을 모아 이 서원을 창건 하였는데, 사당을 상모사(尙慕祠)라 하였고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이라 하였으며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응교(應敎) 강세백(姜世白)이 지었다.
고종 5년(1868년)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강당은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齋室)로 삼고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서 정국군 박위장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소총재 박기 공(公)을 배향하여 향사가 받들어 졌다.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를 그전대로 중건하였는데 현재 서원의 배치는 사당인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으며 바깥에는 강당인 경보당이 있다.
특히 본 서원에 주향으로 모셔져 있는 박위는 고려 우왕(禑王) 때 김해부사(金海府使)로서 여러번 왜구(倭寇)를 격파하고, 우왕 14년에는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되어 전선(戰船) 100척을 인솔하여 대마도를 쳐서 300여척의 왜선(倭船)을 불태우는 등 대승(大勝)하였으며, 지난 1994년 우리 손으로 건조된 잠수함에 이 박위장군의 이름을 빌려 (박위함(朴威艦))으로 명명(命名)되기도 했다.

3. 고려 말 대마도 정벌의 위훈과 위화도 회군에 공이 컸던 충의백 정국군 박위 (忠義伯靖國君 朴위)장군과 조선초의 문신인 이조참판 박기(吏曹參判 朴耆)선생 부자(父子)를 봉향(奉享)하는, 경상남도 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된 신남서원(莘南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1822년(순조 22년)에 후손인 박성기(朴聖基)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士林)들이 공론을 모아 이 서원을 창건하였는데 사당을 상모사(尙慕祠),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이라 편액하고, 응교 강세백(應敎 姜世百)이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지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창원시 용지공원 경내에 서 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에 이르러 나라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철폐된 후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로 삼아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의식에 따라 향사를 받들어 왔었다. 그후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밀양 유림들의 공의(公議)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尙慕祠)를 그전대로 중건하였고, 1984년에는 복원에 따른 고유제(告由祭)도 올려 지난날의 서원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신남서원은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고, 바깥에 강당인 경보당이 있으며 경내에 박위 장군과 박기 선생의 제단비가 있는데 밀성박씨 정국군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신남서원에 봉향된 정국군 박위(靖國君 朴위)(1332∼1398)는 공민왕초에 우달치(于達赤)로 보임되었다가 김해, 진주, 계림 고을의 수령을 거쳐서 세 번이나 합포의 진수(鎭守)를 하였다. 박위 장군의 큰 전적으로는 황산강 싸움과 대마도 정벌 등을 들 수 있는데 전략상으로는 김해 분산성과 동래성의 축성, 그리고 울산 신학성 축성의 자문과 그것의 준공일 것이다. 1375년 겨울 왜구가 침범하여 김해가 폐허화되었을 때 부사로 부임하여 난민 구호와 파괴된 가옥의 복구를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김해는 원래 삼면이 물과 갈대로 둘러싸여 왜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산성을 구축하였는데 후에 황산강 싸움 때 이 산성을 이용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지금도 분산성 경내에 박위 장군의 축성 사적비가 남아 있고, 분산성은 사적(史蹟) 66호로 지정되어 있다. 1384년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재임시 성균사예 이문화(李文和)가 당시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화되어 있던 울산 복구를 위하여 자문을 구하자 울산 신학성 축성을 권유하였고, 성곽이 완공될 무렵 박위는 원수 겸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합포로 진을 옮기게 되었다. 1388년에는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요(遼)의 정벌에 나섰다가 회군하여 경상도 절제사(節制使)가 되었고, 1389년 2월에는 대마도정벌에 나섰다. 그때 일본은 대마도와 일기도를 중심으로 고려의 변방을 약탈하고 방화, 살륙을 자행하였다. 그때마다 고려는 방어에만 힘썼고 일본에 사자를 보내어 왜구의 금지를 교섭하였지만 일본 막부의 명령은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박위는 부사로서 김해 분산성(盆山城)을 쌓고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신학성(神鶴城)을 완공케하고 동래성을 쌓아 왜구를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전함 100척을 인솔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승하였다. 후에 이성계를 도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충의백(忠義伯)으로 봉해졌다. 조선 개국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지내고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졌다. 즉 장군은 국난 극복의 굳은 신념과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적 방어에 대비하겠다는 장수로서의 지략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는데, 1390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그러나 박위는 위화도 회군과 공양왕 옹립까지는 이성계와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고려말 이성계의 전권에 대항하였다는 김종연 사건에 연루되어 풍주로 유배되었고, 1년여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으나 붕괴 직전의 고려조를 위해 구국충정을 가졌지만 정몽주마저 피살되는 대세를 막을 수 없어 이성계의 회유에 시기를 기다렸었다. 1392년에는 이태조가 등극하였고, 1393년에는 양광도절제사(揚廣道節制使)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명에 의해 두문동에 있는 고려조의 충신들을 찾아가기도 하였고, 고려 왕조의 회복을 위해 이흥무에게 미래에 대해 점을 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게 되었고, 장군의 덕망과 무인으로서의 기상과 재조(才操)를 잘 아는 이성계의 특별한 배례(配禮)로 무죄가 되어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 보직되었지만 계속적인 대간(臺諫)들의 상소로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이성계는 박위의 덕망과 무인(武人)으로서의 기상을 아껴 수감 중인 박위를 직접 가서 위로를 하였고, 사헌부의 연이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옹호하여 무죄로 특사케 하였으나 결국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방원의 추종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범을 잡으려 범굴에 들어갔다가 범은 잡지 못하고 희생만 당한 격이 되고 말았으니 혼자의 힘으로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리라. 이조참판 박기(吏曹參判 朴耆)는 조선초 문과에 급제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고, 후에 가의대부(嘉義大夫) 및 이조참판, 경연참찬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문학으로서 명성을 떨치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출생 연도와 별세일, 묘소 등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아마 선친인 박위 장군의 피살과 함께 그 후손들이 각지에 흩어지면서 유적을 보전하기가 어려운 시대 상황을 맞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밀양지(密陽誌), 밀양 향선생안(鄕先生案)등의 책에 단편적으로 실려 있고 조선초 이래의 저명한 인물이란 점이 기록된 사실만 전해질 뿐이다.KBS 드라마『용의 눈물』에도 그 활약상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네 번째 잠수함을『박위함』으로 명명되기까지 한 박위 장군은 고려 공양왕 때 충의군에 봉해졌고,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정국군에 봉하여진 고려의 충신이자 우리 해군사(海軍史)에 길이 빛날 국가적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 후 불행히도 왕위 계승에 따른 골육상쟁의 와중에서 희생되어 비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 후손들은 연고를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임진왜란 후 사회질서가 회복되면서 친족 찾기에 노력한 결과 밀양, 충주, 대구, 영천, 창원 등지에 많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800년에 이르러서야 충의백 정국군 박위를 중조(中祖)로 하는 작업을 수개월 동안 논의한 끝에 정국군 파보를 작성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밀성박씨 정국군파(密城朴氏靖國君派)가 형성되었으니, 역사의 비정함과 함께 오랜 세월에 걸친 그 후손들의 고통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長劍一擧賊魂散(장검일거적혼산) 장검을 휘두르니 적의 혼이 흩어지고 憂國誠忠守古天(우국성충수고천) 우국의 참된 충성 옛나라를 지켰도다.
淸節偉勳靑史赫(청절위훈청사혁) 맑은 절개 큰 훈공이 역사에 찬란하니
將軍懿蹟億年傳(장군의적억년전) 장군의 빛난 사적 억만년을 전하리라.

밀양박씨홈페이지에서

'종친회 > 정국군총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국군(靖國君) 휘 위(葳) 행록  (0) 2007.07.01
정국군 휘 위(靖國君諱 威)계보  (0) 2007.07.01
정국군파 종친회 오락(하)  (0) 2007.06.03
대종회 오락(상)  (0) 2007.06.03
정국군파 대종회  (0) 2007.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