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위 기록분

태조의 공적을 치하하는 교서

조전 2011. 9. 11. 10:02

太祖 1권 總序 110번째기사
태조의 공적을 치하하는 교서


〔○〕四月, 恭讓遣中使問疾, 强起之, 賜敎書于九功臣, 褒美之, 給廐馬一匹、白金五十兩、帛絹各五端、金帶一腰, 仍慰宴于內殿。 其賜太祖敎曰:
嗚呼! 除非常之變者, 必待命世之才; 樹萬世之功者, 必享無(彊)〔疆〕之報。 昔我太師佐太祖, 肇一三韓, 與享太室, 式至于今, 垂五百年。 往者李仁任陰導玄陵影殿之役而取上相, 歸怨于上, 卒致甲寅之變而無嗣。 仁任乃用不韋之計, 以玄陵朝妖僧辛旽所生兒, 詐稱玄陵宮人所出而立之。 玄陵母后以爲不可, 宰相李壽山請立宗親, 仁任不從, 國人失望, 黃霧四塞, 日光不現。 之主喪而葬玄陵也, 虹圍太陽; 其主烝也, 鴞鳴太室, 霆奮地震; 其齋玄陵之考毅陵之忌也, 大風以雨, 雷電且雹; 其襲爵也, 風拔祧廟寢園松栢, 太室鷲折, 廟門仆, 御廩災。 是祖宗之靈, 動威以絶也。 戮般若以滅口, 而司平新門自頹; 葬枯骨曰母, 而柩幄一日再災, 是天示萬歲以之爲般若子也。 立二年, 而其母名氏未定, 宰相金續命曰: “天下未辨其父者, 或有之矣, 未辨其母者, 我未聞也”, 而幾見戮, 以玄陵母后力救, 得不死; 金庾王氏於帝, 而還見戮, 國人寒心結舌。 仁任姪女而生, 於是王氏興復之望, 絶矣。 仁任專國, 毒痡生靈十五年, 而又狂悖, 謀攻遼東, 欲擧三韓百萬生靈而糜爛之。 卿副曺敏修以行軍過鴨江, 卿諭諸將以社稷存亡之計而回軍, 是卿肉吾民於旣骨也。 社稷之不墟, 惟卿是賴。 卿勇冠三軍, 位崇兩府, 功名蓋世而不矜; 好讀《綱目》《衍義》, 感留侯絳侯武侯梁公之忠, 故回軍之際, 議興復, 敏修亦以爲然, 旣還而黨於其族仁任李琳, 沮卿議而立, 自爲冢宰, 王氏興復, 失一大機。 卿隱忍就職, 而以公義開諭敏修, 乃極臺諫之選, 以振紀綱。 於是憲司劾敏修以貪婪撓法而擊去之。 卿坐而待旦, 求賢如渴, 疾惡如讎。 凡民一毫之利, 必欲興之; 一髮之害, 必欲去之。 開言路而達下情, 擧逸民而布公道, 向者苞苴奔競之風、鬻官貨獄之習, 一朝而變, 野無遺賢, 朝無倖位。 遣使授鉞, 觀察黜陟, 而藩鎭不敢養寇, 牧守不敢殃民。 排群小之邪說, 革私田於諸道, 拯民湯火之中, 躋之富壽之域。 用圭田采田之制, 給京甸仕者之田。 優君子而嚴守衛, 爵之而非私, 罰之而非怒。 卿之誠心, 光明正大, 如靑天白日, 愚夫愚婦之所共見, 其所營爲, 無非所以爲興復王氏之地也。 己巳冬, 所遣請朝尹承順齎禮部欽奉聖旨咨文來, 曰: “高麗君位絶嗣, 以異姓假王氏, 非三韓世守之良謀。 果有賢智陪臣在位, 定君臣之分, 雖數十世不朝, 亦何患哉? 連歲來朝, 又何厭哉? 童子不必赴京。” 此聖天子念玄陵當四海未定之際, 率先稱臣, 使天下知天命之有歸, 大有功於佐運, 故憫其絶祀, 而望復興於王氏臣子者切矣。 外祖李琳以冢宰, 秘聖旨而不發, 兇謀不測。 辛氏之變, 不朝卽夕, 王氏已爲鼎中之魚, 存亡在於呼吸, 而卿不顧萬死, 躬秉大義, 爲我王氏, 定萬世策, 德符夢周湧奇長壽石璘道傳八將相從而贊之。 十一月十五日, 宣天子旨于玄陵定妃之庭, 迎予宗邸, 俾後玄陵, 不刑一人, 不崇朝而除十有六年南面之辛氏。 其姻親支黨根據盤結于三韓, 環觀破膽, 革面向順而不敢動, 人無變色, 日如陽春。 上以紹三十一代相承之序, 下以開千萬億世無疆之休, 卿興復之功, 非絳侯、五王所擬倫也。 卿世積忠義, 乃心王室, 德厚流光, 發于卿身。 經文緯武, 王佐之才; 國爾忘家, 社稷之臣。 天地祖宗之所篤生, 三韓安危之所注意。 遇知玄陵, 殲紅賊而收兩京, 驅孼僧而安王氏, 走納氏而威沙漠, 敗倭寇而保西海, 擊引月而懾扶桑, 而卿感玄陵之知遇, 痛宗廟之絶祀, 誓取日於虞淵, 至誠徹乎天地, 至忠通乎祖宗。 至公至正, 有以服三韓之心; 至仁至恩, 有以結萬姓之歡。 天祐大順, 人助大信, 故興復如是其易也。 卿於是信報玄陵之知矣。 昔周公勳勞, 而俾侯于東。 予嘉卿忠, 分茅世封, 圖形銘功, 宥胤無窮。 予率元子, 告于閟宮。 嗚呼! 卿活我兆民, 紹我宗祀。 再造我三韓之功, 以不腆之褒, 何報萬一哉? 卿爲中興元臣, 名侔乎太師, 任重乎阿衡。 立經陳紀, 爲萬世程, 旁求俊彦, 重我朝廷, 弼予涼德, 保我社稷, 與天無極, 於萬斯年, 與享烝嘗, 則予涼德與有光焉。 卿之子孫, 象卿忠良, 永世不忘, 股肱我後嗣王, 與國咸休, 顧不韙歟!
又錄回軍功, 下敎褒奬, 賜田一百結。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4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어문학-문학(文學)

 

4월, 공양왕중사(中使) 78) 를 보내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한 개를 내리고 이내 내전(內殿)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아아! 비상(非常)한 변고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人才)를 기다리게 되며, 만세(萬世)의 공을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한이 없는 보수(報酬)를 받게 마련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79)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대실(大室) 80) 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거의 5백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현릉(玄陵) 81) 에게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인도하여 상상(上相) 자리를 차지하고는, 임금에게 원망을 돌아가게 하여 마침내 갑인년의 변고82) 를 초래하여 사자(嗣子)가 없게 하였다. 인임(仁任)은 이에 여불위(呂不韋)가〉 진(秦)나라를 도적질한 계책83) 을 써서, 현릉조(玄陵朝)의 요망스런 중[僧] 신돈(辛旽)의 소생인 우(禑)로써 거짓으로 현릉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이라고 일컫고 이를 왕으로 세우니, 현릉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고 했으며, 재상(宰相) 이수산(李壽山)의 종친(宗親)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인임이 따르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했으며, 누른 안개[黃霧]가 사방에 차 있어 햇볕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禑)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현릉을 장사할 적엔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으며, 증제(烝祭) 84) 를 주관할 적엔 올빼미가 대실(大室)에서 울고 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했으며, 그가 현릉의 아버지인 의릉(毅陵) 85) 의 기일(忌日)에 재계할 적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천둥과 번개하며 우박이 내렸으며, 그가 작(爵)을 물려받을 적엔 바람이 조묘(祧廟) 86) 침원(寢園) 87) 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대실(大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廩)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보여 우(禑)를 끊으려고 한 것이다.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를 죽여 증언(證言)할 사람을 없애었는데 사평(司平)의 새 문[新門]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죽은 후에 살이 썩어 없어진 뼈를 장사하여 우(禑)의 어미라 하였는데, 널[柩]을 안치한 장막이 하룻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만세(萬歲)에 우(禑)반야(般若)의 아들임을 보이는 것이다.
우(禑)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미의 명씨(名氏)가 정해지지 않으니,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세상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혹 있을 수 있지마는, 그 어미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나는 듣지 못하였다.’하여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현릉의 모후(母后)가 힘써 구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김유(金庾)우(禑)왕씨(王氏)가 아님을 황제에게 말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선뜩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禑)의 아내는 인임(仁任)의 질녀(姪女)인데 창(昌)을 낳았으니, 이에 왕씨(王氏)의 흥복(興復)될 희망은 끊어졌다. 인임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15년이나 되었는데, 우(禑)가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꾀하여 삼한(三韓)의 백만 백성들을 징발하여 다 죽이려고 하였는데, 경(卿)과 부관(副官) 조민수(曺敏修)가 행군(行軍)이 압록강을 지날 때, 경(卿)이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매여 있다는 계책으로써 깨우쳐 군사를 돌이켰으니, 이것은 경이 우리 백성들의 이미 죽은 것을 다시 살게 한 것이오.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은 다만 경에게 힘입었소. 경의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고 직위는 양부(兩府) 88) 에 높았으며, 공명(功名)은 세상에서 뛰어났으나 자랑하지 않았소. 《강목(綱目)》 89) 《연의(衍義)》 90) 를 읽기를 좋아하여 유후(留侯) 91) ·강후(絳侯) 92) ·무후(武侯) 93) ·양공(梁公) 94) 의 충성에 감동한 까닭으로, 군사를 돌이켰던 그 즈음에 흥복(興復)을 의논하니, 민수(敏修)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소. 그러나, 이미 돌아와서는 그 친척 인임(仁任)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경(卿)의 의논은 저지시키고 창(昌)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총재(冢宰) 95) 가 되었으니,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일이 한 번의 큰 기회를 잃게 되었소. 경은 속으로 견디고 참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공의(公義)로써 민수(敏修)를 개유(開諭)하고, 이에 대간(臺諫)의 인선(人選)을 철저히 하여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켰소. 이에 헌사(憲司)에서 민수를 탐욕이 많아 법을 남용(濫用)했다고 탄핵하여 쳐서 제거하였소.
경은 밤에 생각한 일이 있으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현인(賢人)을 구하기를 목마름과 같이 하며,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여, 모든 백성들의 조그만 이익도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고, 조그만 해로움도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며, 언로(言路)를 열어 민정(民情)을 통하게 하고, 일민(逸民) 96) 을 천거하여 공도(公道)를 널리 폈소.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奔競) 97) 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휘권[鉞]을 주고,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출척(黜陟)을 행하매, 번진(藩鎭) 98) 이 감히 구적(寇賊)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목수(牧守)가 감히 백성을 해하지 못하며, 여러 소인의 사설(邪說)을 배척하여 사전(私田)을 여러 도(道)에서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제하여, 넉넉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지경으로 올려 놓았소. 규전(圭田) 99) ·채전(采田) 100) 의 법을 채용하여 서울에 벼슬하는 사람에게 전지(田地)를 공급함으로써 군자(君子)를 우대하고 수위(守衛)를 엄하게 하니, 관작을 주되 사정(私情)이 아니고, 형벌을 쓰되 노(怒)한 것이 아니오, 경의 성심(誠心)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고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명백하여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다 함께 보는 바이니, 그 경영해 하는 일이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터전이 아닌 것이 없었소.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보낸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으로 보낸 것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왕위는 자손이 끊어져서 이성(異姓)으로써 왕씨(王氏)로 꾸몄으니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관위(官位)에 있어 군신(君臣)의 본분(本分)을 지킨다면, 비록 수십 대(代)나 조회하지 않더라도 또한 무엇이 걱정되겠으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싫겠는가? 동자(童子) 101) 경사(京師)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현릉(玄陵)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시기에 남보다 앞서 신하라 일컬어, 천하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곳이 있음을 알게하여, 천운을 도와주는데 큰 공이 있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제사(祭祀)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王氏)의 신자(臣子)에게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간절하기 때문이었소. 창(昌)의 외조부(外祖父)인 이임(李琳)이 총재(冢宰)로서 황제의 조칙을 숨기고 발표하지 아니하여, 흉악한 꾀가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신씨(辛氏)의 변고는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발생하게 되었소. 왕씨(王氏)는 이미 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존망(存亡)이 호흡(呼吸)에 달려 있었는데, 경이 만번 죽을 고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몸소 대의(大義)를 잡아 지켜, 우리 왕씨(王氏)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정하니, 덕부(德符)·몽주(夢周)·용기(湧奇)·장수(長壽)·석린(石璘)·조준(趙浚)·박위(朴葳)·도전(道傳) 8명의 장수가 서로 따라 도와서 11월 15일에 천자의 조칙을 현릉정비(定妃)의 뜰에 선포하고, 나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여 현릉의 후사(後嗣)로 삼아, 한 사람도 처형(處刑)하지 않고 새벽에서 조반(朝飯) 때가 되기 전에 16년 동안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제거하였소. 그 인친(姻親)과 지당(支黨)들이 온 나라에 뿌리가 서려 얽혔으나,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보고는 간담이 떨어져 면모(面貌)를 고치고 향순(向順)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며, 햇빛은 봄과 같았소. 위로는 31대(代)를 서로 계승하던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천만억(千萬億) 대(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열어 놓았으니, 경의 흥복(興復)한 공은 강후(絳後) 102) 오왕(五王)103) 에게 비길 바가 아니오.
경은 대대로 충의(忠義)를 쌓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했는데, 덕(德)이 후하매 유광(流光)이 경의 몸에 나타났으며,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을 다 갖추었으니 왕좌(王佐)의 재주요, 나라만 위하고 집은 잊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요, 천지와 조종(祖宗)께서 도타이 낳았으니[篤生] 삼한(三韓)의 안위(安危)에 주의(注意)한 것이고 현릉(玄陵)에게 지우(知遇)되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양경(兩京) 104) 을 수복하고, 요망스런 중[僧]105) 을 몰아내어 왕씨(王氏)를 편안하게 하고, 나씨(納氏) 106) 을 달아나게 하여 사막(沙漠)에 위엄을 떨쳤고, 왜구를 패퇴시켜 서해를 보전하고, 인월(引月)에서 공격하여 부상(扶桑) 107) 을 겁내게 했는데, 경은 현릉의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종묘(宗廟)의 절사(絶祀)를 슬퍼하여 해가 지는 곳[虞淵]에서 해를 붙잡기를 맹세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은 천지에 통하고, 지극한 충성은 조종(祖宗)에 통하였소.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대함은 삼한(三韓)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인애(仁愛)하고 지극히 은혜로움은 만백성의 환심을 맺게 하였소. 하늘은 대순(大順) 108) 을 돕고 사람은 대신(大信) 109) 을 돕는 까닭에, 흥복(興復)이 이같이 쉬웠던 것이오. 경은 이에 현릉의 지우(知遇)를 진실로 갚게 되었소. 옛날에 주공(周公)이 국가에 훈공이 있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동방에 제후(諸侯)로 삼았으니, 내가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모토(茅土)를 나누어 대대로 봉후(封侯)하게 하고, 모습을 그리고 공(功)을 새기며, 자손에게 무궁한 세대까지 유사(宥赦)하게 하오. 내가 원자(元子)를 거느리고 이 일을 종묘에 고하오. 아아! 경이 우리의 억조 백성을 살리고 우리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건국하게 한 공로는, 변변치 못한 포상(褒賞)으로써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는가? 경이 중흥(中興)의 원신(元臣)이 되어 명망은 배 태사(裵太師) 110) 와 같으나, 임무는 상(商)나라 아형(阿衡) 111) 보다 무겁도다! 경륜(經綸)을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의 법칙으로 삼고, 준수한 인재를 좌우로 구하여 우리 조정을 거듭 나게 함으로써, 덕이 적은 나를 보필하고, 우리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게 하니,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이 만년 동안에 조상의 제사와 함께 제향(祭享)하게 된다면, 나의 덕이 적은 사람도 함께 빛이 있겠소! 경의 자손도 경의 충량(忠良)을 본받아 영세(永世)토록 잊지 않고서, 나의 후사왕(後嗣王)을 보필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경사를 누린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군사를 돌이킨 공을 기록하여 교지(敎旨)를 내려 포장(褒奬)하고 전지(田地) 1백 결(結)을 내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4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