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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신개가 헌릉의 비문에 무인년 기사의 문구가 사실과 다르다고 상언하다

조전 2011. 9. 11. 13:54

世宗 82卷, 20年(1438 戊午 / 명 정통(正統) 3年) 9月 25日(丙午) 1번째기사
찬성 신개가 헌릉의 비문에 무인년 기사의 문구가 사실과 다르다고 상언하다


○丙午/受常參, 視事。 初, 贊成申槪上言:
竊惟歲在戊寅, 權姦乘太祖違豫, 謀欲挾幼專國, 外則鄭道傳等聲言宿衛群聚宮側, 日夜謀議; 內則李濟等日夜侍側, 肆行讒構, 內外相依, 聲勢頗露, 當時識者罔不憂懼。 我太宗深懼禍迫, 謀將出避, 時有忠臣義士言之曰: “忽君父之危, 絶國人之望, 而謀存一身, 非義也。” 固執留之, 至有痛憤涕泣者。
至八月二十六日之夕, 內嬖等詐稱疾革, 矯旨急召諸王子, 我太宗與昆弟趨入宮內, 覺其有變, 稱疾而退, 單騎歸邸, 至無可奈何, 坐而待之, 宗社安危, 間不容髮。 忽有一二忠義之士聞變趨邸, 擁逼而出, 太宗不獲已而率腹心數人, 倉卒應變, 直趨姦黨之所, 不期而會者甚衆。 姦黨伏誅, 萬世之業, 定於一夕, 此乃天也, 非人力所逮也。
臣伏覩獻陵碑文, 記戊寅之事曰: “太宗炳幾殲除。” 臣竊謂此語不止泯其實跡, 大戾太宗之心。 夫幾者, 動之微也。 先於事未形著而行之, 謂之炳幾; 或有敢行不根無萌之事而巧飾之, 亦曰炳幾。 我太宗心地光明正大, 如靑天白日, 斯言也, 無乃啓後世之疑乎! 無亦使天日之心不明, 而在天之靈有所不懌乎?
且此擧也, 與太宗丙戌之變, 事同而情異。 建成, 兄也, 太宗有推刃之慘; 芳碩, 孼弟也, 而國人誅之。 太宗夙有兵備, 不俟彼變而先發之; 我太宗素無兵備, 而有彼之變, 然後乃應之。 以此觀之, 其含隱忍之誠心、不獲已之實跡, 遠過於唐宗矣。 刋之于石, 所以傳示無窮也, 以此誣妄傳示無窮可乎? 臣反覆思之, 太宗此擧, 再安王業, 事重義大, 所當特書大書, 不可微婉其辭。 伏望聖裁。
上重其事, 留中不下數月矣。 一日出此書, 付之都承旨金墩曰: “汝獨見之, 勿令人知。 他日予將親敎。” 至是日視事畢, 諸臣皆退, 獨留敎曰: “予親聞之, 太宗曰: ‘(戍)〔戊〕寅八月變生之日, 芳碩等矯旨, 金重貴促諸王子入宮, 予呼撫安君曰: 「隨我來。」 撫安君搔首逡巡而入內, 予與益安君數人出西門而去。’ 太宗之心, 蓋欲保全撫安君也。 又聞於人, 云: ‘庚辰二月之變, 太宗曰: 「予將何顔出兵應之乎?」 義安君完山君天祐等泣而請之曰: 「不可已也。」 於是不得已出兵。’ 《太宗實錄》, 予不可見矣。 其令春秋館入太祖恭靖王實錄于內。” 上見實錄, 還出付曰: “卿抄錄戊寅庚辰之事以進。” 於是抄錄以進, 上不開見, 還付曰: “實錄所載甚疎, 予所聞之事, 亦多不載矣。 然實錄不可更改, 碑文宜改記甚悉。” 卽令議于, 曰: “臣聞之, 黃喜云: ‘戊寅之變, 太宗先知, 欲單騎避入於東北面, 趙英茂把上衣而泣止之。’ 且史官本草記事稍詳, 而修實錄者略之矣。 實錄亦當改記。” 上謂曰: “則旣知春秋矣。 今抄錄史官本草以進, 本草記詳, 則實錄修改, 似亦宜矣。 此大事也, 而兩議政亦當知之。 汝見兩議政議之。” 議于兩議政, 黃喜曰: “戊寅庚辰之事, 臣雖不目覩, 臣所聞不載於實錄者亦多矣。 史草旣詳, 則實錄亦宜改之。 若不載於史草, 則實錄固不可改也, 而碑文固當改之。” 許稠亦同議。 數日, 申槪權踶等抄錄史官本草以進, 亦不詳矣。 但戊寅生變之夕, 諸王子出西門, 或奪他馬以歸靖安君, 蓋欲保全撫安君等語, 實錄所無也。 權踶曰: “昔聞於中樞院副使田興, 太宗興安君之死, 驚悼曰: ‘生亦可矣, 不必殺也。’ 卽命斂屍。 夫, 侍從太宗者也。 若問於, 則庶或知其大槪矣。” 上令問於, 曰: “太宗道鎭撫, 常隨太宗太宗有時與益安懷安上黨諸君, 於暗處辟人偶語, 臣心以爲何事? 至八月二十五日夕, 太宗監巡訖, 詣闕內入直所, 益安懷安上黨諸君先詣矣, 時未下人定鍾矣。 太宗呼臣曰: ‘汝還監巡廳察巡官。’ 俄而中官出曰: ‘上病篤, 諸王子急入宮。’ 太宗曰: ‘諸兄可先入, 予腹痛, 如廁後將入矣。’ 卽潛出還本邸。 臣在監巡廳, 初更已盡。 太宗率十餘騎過光化門, 臣出監巡廳, 謁馬前曰: ‘臣亦隨之乎?’ 太宗曰: ‘汝其在此察行巡。’ 太宗到東門外南誾妾家, 火其隣家, 光明如晝, 斬鄭道傳沈孝生等。 李茂出曰: ‘我爲李茂也。’ 命赦之, 以前此依違其間故也。 南誾逃, 捕送巡軍獄。 太宗還監巡廳, 夜未三鼓。 於是益安懷安上黨諸君, 稍稍來集, 兵勢稍振。 柳萬殊率其子原之, 帶甲走馬, 見太宗不下馬曰: ‘是何事歟?’ 太宗曰: ‘拿出。’ 萬殊曰: ‘令公何迫我如此?’ 軍士爭斬之。 時親軍都鎭撫趙溫朴葳入直都鎭撫廳, 太宗使人召等, 聞命, 卽率麾下甲士牌頭等, 出光化門謁馬前, 不卽從命。 太宗令盡出入直甲士, 卽使牌頭等還入闕, 盡率甲士而來。 未幾, 勤政殿以南甲士盡出趨附, 兵勢大盛。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等承太宗之命, 趨來會坐於刑曹門外, 凡有所爲, 皆令都評議司使[都評議使司]處置。 其夜, 恭靖王爲上疾篤, 醮祭于昭格殿, 太宗使人請來, 恭靖, 已聞變逃矣。 太宗使人廣求, 又有人出自宮內云: ‘昨昏宮內聞靖安君逃出。’ 興安君驚云: ‘恨不及。’ 二十六日巳時, 世子出光化門, 令張哲等領兵擁衛, 至南大門外縊死。 午後, 撫安君光化門, 命配通津。 日沒, 興安君李濟出西門, 軍士追及家前斬之。 太宗聞之, 驚曰: ‘保全亦可, 雖生存無害也。’ 卽呼臣曰: ‘興安君死矣。 奴婢皆逃散, 汝率甲士二十餘騎, 到其家, 收斂其屍。 令奴婢毋散曰: 「若散者, 予當不赦。」 謂翁主曰: 「毋驚。」’ 臣於是盡如所命, 使婢子傳命曰: ‘我, 靖安君道鎭撫也。 靖安君興安君之死, 命我斂屍, 使翁主毋驚。’ 翁主聞之感喜。 撫安君楊花渡被殺, 太宗聞之, 亦驚悼。 撫安興安之死, 皆非太宗之意也。” 所言啓之, 仍啓曰: “今之所言, 但大槪耳, 未知其詳。 雖從於太宗, 本爲微賤, 豈能與知其謀乎? 知戊寅庚辰之事, 莫如李叔蕃耳。 但叔蕃貶於遐方, 若使人往問之, 則可矣。” 上頷之。 後又問曰: “議諸大臣, 僉曰: ‘使人問之可也。’ 申槪云: ‘率來問之可也。’ 於爾意以爲何如?” 對曰: “叔蕃得罪於太宗, 不可入京。 擇遣職兼春秋穎悟者, 往問於貶所可矣。” 上曰: “所問非小事也, 必須到京, 或親問或令如爾輩問之, 則可以無遺知之。 使人往問而倘有未盡, 則焉能又遣人問之乎?” 令錄叔蕃罪名以進, 卽遣知印金稷孫叔蕃, 仍敎曰: “叔蕃雖犯罪, 年已老矣。 驛馬供饌, 汝其護視, 毋令路上發病。”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164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세종 82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9월 25일(병오) 1번째기사
찬성 신개가 헌릉의 비문에 무인년 기사의 문구가 사실과 다르다고 상언하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당초에 찬성 신개(申槪)가 상언(上言)하기를,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지난 무인년2893) 에 권력을 쥔 간사한 무리들이 태조께서 위예(違豫) 중에 계심을 틈타서 어린 왕자를 끼고 국권을 전단(專斷)하려고 꾀하여, 밖으로는 정도전(鄭道傳) 등이, ‘숙위(宿衛)한다.’ 이르고서, 궁전 곁에 그 일당을 모아 주야로 모의하였고, 안으로는 이제(李濟)2894) 등이 주야로 곁에서 모시면서 참언(讒言)과 거짓말을 함부로 행하여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매, 그 소문과 세력이 자못 드러나게 되자, 당시 식자들은 모두 이를 우려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 태종께서 화(禍)가 임박함을 크게 두려워하시고, 장차 밖으로 나가 이를 피하시려고 꾀하시던 중, 이때 충신 의사가 있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위태로움을 경홀히 보며, 국민의 여망을 끊어버리고 일신의 생존만을 도모하심은 의(義)가 이닙니다.’ 하고, 굳게 붙잡고 만류하였으며, 심지어는 통분해 우는 자까지도 있었다 합니다.
8월 26일 저녁에 이르러, 내시[內嬖]들이 병환이 위급하시다 사칭하고, 교지를 조작하여 여러 왕자를 급히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태종께서는 여러 형제분과 더불어 궁내로 달려 들어가시다가 무슨 변(變)이 있음을 깨달으시고, 질병을 칭탁하고 물러나와 단기(單騎)로 저택으로 들어갔으나, 어찌할 수가 없게 되어 그대로 가만히 앉아 기다리시는데, 이때 종사(宗社)의 안위(安危)는 그야말로 터럭끝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위급한 순간에 놓여 있었습니다. 홀연 한두 사람의 충의에 불타는 지사가 변을 듣고서 저택으로 달려가서 급히 옹위하고 나갔다 합니다. 태종께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달으시고 심복 몇 사람을 거느리시고 창졸간에 응변(應變)하여, 바로 간당(姦黨)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셨던 바, 기약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모여온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오며, 이에 간당들이 복주(伏誅)되고 만대의 대업이 하루 저녁에 정해졌습니다. 이는 곧 하늘의 뜻이요, 인력의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헌릉(獻陵)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인년의 일을 기록하여 말하기를, ‘태종께서 병기(炳幾)하시와 〈적도를〉 섬멸 제거하셨다. ’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 말은 실상의 자취를 인멸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태종의 심정과 크게 괴려(乖戾) 된다는 것입니다. 대개 ‘기(幾)’라는 것은 기미(幾微)가 태동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일이 형태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이를 행하는 것을 ‘병기(炳幾)’라고 이르고, 혹은 뿌리도 잡지 않고 싹도 트지 않은 일을 감행하고서 이를 교묘하게 꾸며대는 것도 역시 ‘병기’라고 이르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 태종께서 마음가짐은 광명 정대하옵기가 저 청천 백일과 같으셨는데, 이 말이 혹시 후세에 의혹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오며, 또한 그 백일과 같으신 마음을 밝게 나타내지 못하여 하늘에 계신 영혼이 혹시 불쾌하게 여기시지나 않으실른지요, 또 이 거사(擧事)를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병술년의 변(變)과 견주어 볼 때 사건은 같으나 그 정상(情狀)이 다른 바가 있으니, 건성(建成)은 자기 형이였는데도 태종은 칼을 겨눈 참혹성이 있었사오나, 이방석(李芳碩)2895) 은 얼제(孽弟)입니다. 온 나라 사람이 그를 베인 것입니다. 태종은 본시 군비(軍備)가 있어서 저쪽의 변을 기다리지 않고 선수를 썼사오나, 우리 태종께서는 평소 군비도 없었으려니와 저쪽의 변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이에 응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그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옵신 성심(誠心)을 머금고 계셨던 일과, 마지못하여 거사하신 그 실상의 자취는 태종을 훨씬 넘어선 것이 있습니다. 돌에 새기는 것이란 후대에 무궁하게 전하여 보이기 위한 것인데, 이렇게 허망한 말을 무궁한 후세에 전해 보인다면 되겠습니까. 신은 반복해 생각하건대, 태종의 이 거사는 두 번 다시 왕업을 굳힌 것으로서, 일이 중하고 의리가 큰 것이므로 마땅히 대서 특서(大書特書)할 것이요, 그 말을 미미하거나 또는 완곡하게 할 수는 없을 것으로 압니다. 엎드려 성재(聖裁)를 바라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일을 중하게 여겨 전중(殿中)에 머물러 두고 수개월 동안 내리지 아니하였다. 어느날 이 글을 내어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주며 부탁하기를,
“너 혼자만 보고 남은 알지 못하게 하라. 후일 내가 장차 친히 전교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날에 이르러 정사를 마치고 제신들이 다 물러가는데, 유독 김돈만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내가 친히 태종께 듣자오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인년 8월에 변(變)이 발생하던 날 이방석(李芳碩) 등이 교지를 사칭하고 김중귀(金重貴)를 시켜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들어오도록 독촉하였는데, 내가 무안군(撫安君)2896) 을 불러 말하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하였더니, 무안군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머뭇머뭇하다가 대내(大內)로 들어가므로, 나는 익안군(益安君)2897) 등 몇 사람과 더불어 서문으로 빠져 나와버렸다. ’고 하셨는데, 태종의 심중은 아마 무안군을 보전하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경진년2898) 2월 변(變)에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군병을 내어 대응(對應)한단 말이냐.’ 하셨는데,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이 울며 ‘그만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고, 청하여, 이에 마지 못하여 군사를 내었다는 것이다. 태종 실록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고, 춘추관으로 하여금 태조공정 대왕(恭靖大王)2899) 의 실록을 대내로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실록을 보고는 도로 김돈에게 내어주며 말하기를,
“경이 무인·경진년의 일에 관한 기사를 뽑아서 기록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김돈이 이를 발취하여 기록하여 바쳤던 바, 임금이 열어 보지도 않고 도로 김돈에게 주며 말하기를,
“실록에 실려 있는 것이 너무 간략하여, 내가 들은 일들도 역시 많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록은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고, 비문만은 마땅히 소상하게 고쳐 써야 할 것이다.”
하고, 즉시 김돈으로 하여금 신개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신개는 말하기를,
“신이 황희(黃喜)에게 듣사온즉, 무인의 변을 태종께서 먼저 아시고 단기(單騎)로서 동북 방면으로 피해 들어가시려고 하시는 것을 조영무(趙英茂)태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만류하였다고 하옵니다. 사관(史官)의 본초(本草) 기사는 꽤 상세하게 되어 있는 것을 실록을 편수하던 자들이 이를 간략하게 만들었다고 하오니, 실록도 역시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돈에게 이르기를,
신개는 이미 《춘추(春秋)》의 필법을 알고 있다. 이제 사관의 본초(本草)를 발취 기록해 올리게 하여, 그 본초의 기록이 과연 상세하다면 실록을 다시 고쳐 엮는 것이 옳을 것도 같다. 이는 큰 일이므로 두 의정(議政)도 역시 알아야 할 것이니, 네가 두 의정을 보고 이를 의논하여 보라.”
하였다. 이에 김돈이 두 의정에게 의논하니, 황희는 말하기를,
“무인·경진년의 일을 신이 비록 목격하지는 못하였사오나, 신이 들은 바만 해도 실록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 사초가 이미 자세히 되어 있다면 실록도 또한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나, 만약 사초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실록은 진실로 고칠 수 없사옵고, 비문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고, 허조도 역시 황희의 의논과 같았다. 수일 후에 신개·권제(權踶) 등이 사관의 본초(本草)를 발취해서 기록하여 바쳤는데, 역시 상세하지 않았다. 다만 무인년의 변이 발생하던 저녁에 여러 왕자가 서문으로 나갈 때, 혹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갔다고 되었고, 정안군(靖安君)2900) 무안군(撫安君)을 보전하려고 하였다는 등의 말은 실록에 없는 사실이었다. 권제가 말하기를,
“전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전흥(田興)에게 듣사온즉, ‘태종께서 흥안군(興安君)2901) 의 죽음을 듣고 놀라고 애도하여 말하기를, 「살려도 괜찮은데, 죽일 필요까지는 없는 것을.」 하고, 즉시 전흥에게 명하여 시체를 거두게 하셨다. ’는 것입니다. 대개 전흥태종을 시종(侍從)하던 자입니다. 전흥에게 이를 물으실 것 같으면, 혹은 그 대개(大槪)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김돈으로 하여금 전흥에게 이를 물으니, 전흥이 말하기를,
“신 태종의 도진무(道鎭撫)가 되어 항상 태종을 수종하였사온데, 태종께서 때로는 익안(益安)·회안(懷安)2902) ·상당(上黨)2903) 등 여러 군들과 더불어 어두운 골방에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하셨는데, 신은 속으로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8월 25일 저녁에 태종께서 감순(監巡)2904) 를 끝마치고 궐내로 나아가서 직소(直所)로 들어가시니, 익안·회안·상당 등의 여러 군(君)들이 이미 먼저 나아가 있었는데, 때는 아직 인정(人定)의 종(鐘)이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태종께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감순청(監巡廳)2905) 으로 돌아가서 순관(巡官)을 살피도록 하여라. ’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중관(中官)이 나와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병환이 위독하시니, 여러 왕자들은 급히 입궁(入宮)하도록 하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형님들은 먼저 들어가 보시지요. 나는 복통(腹痛)이 나서 변소에 갔다가 온 뒤에 곧 들어가겠습니다.’ 하시고, 즉시 몰래 빠져 나와 본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이 감순청에 있으려니까 초경(初更)이 이미 다하였는데, 태종께서 10여 인의 기병을 거느리시고 광화문(光化門)을 지나시기에, 신이 감순청에서 나와 말 앞에서 뵙고 말씀드리기를, ‘신도 따를까요.’ 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곳에 있으면서 행순(行巡)하는 것을 살피라. ’고 하시고는 태종께서는 동문(東門) 밖 남은(南誾)의 첩의 집에 이르시와, 그 이웃집에 불을 지르시어, 밝기가 마치 대낮과 같았으며,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 등을 목 베이셨는데. 이무(李茂)가 나오며 말하기를, ‘나는 이무란 사람이요.’ 하니, 명하시어 놓아주셨습니다. 이무는 그 앞서 그 중간에서 확실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까닭입니다. 남은은 도망하다가 체포되어 순군옥(巡軍獄)으로 송치되었습니다. 태종께서는 감순청으로 돌아오셨는데, 밤은 아직 3고(鼓)가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이리하여 익안·회안·상당 등 여러 군들이 꾸역꾸역 모여와 군세가 점차 떨치게 되었습니다. 유만수(柳萬殊)가 그 아들 유원지(柳原之)를 데리고 갑옷을 입고 말을 달려와서, 태종을 뵙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이오. ’라고 하니, 태종께서, ‘잡아내라. ’고 말씀하시자, 만수는, ‘영공(令公)이 어찌 내게 이같이 핍박한단 말이요.’ 하는 것을, 군사들이 서로 다투어 그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이때 친군 도진무(親軍都鎭撫) 조온(趙溫)·박위(朴葳) 등이 도진무청(都鎭撫廳)에 입직하고 있었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조온박위 등을 부르시니, 조온은 명을 듣고 즉시 휘하의 갑사(甲士)와 패두(牌頭) 등을 인솔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말 앞에 와서 뵙고, 박위는 즉시 명에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태종께서 조온에게 명하사 이로 하여금 입직한 갑사들을 다 데리고 나오게 하시니, 조온은 즉시 패두들을 시켜서 도로 궁궐에 들어가서 갑사를 다 데리고 나왔으며, 얼마 아니 되어서 바로 근정전 이남의 갑사들은 모두 뛰어나와서 가담하여 군세는 크게 성세를 이루게 되었고, 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태종의 명을 받고 달려와서, 형조(刑曹)의 문밖에 회좌(會坐)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 시행하는 바는 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공정왕(恭靖王)께서는 임금님의 병환이 위독하시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고 계셨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보내어 불러 오게 하셨으나, 공정왕께서는 이미 변을 들으시고는 도망하고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널리 찾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궁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밤에 궁 안에서는 정안군이 도망해 나갔다는 말을 듣고, 흥안군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손이 미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 ’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26일 사시(巳時)에 세자(世子)가 광화문으로 나왔사온데, 장철(張哲) 등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옹위(擁衛)하게 하였으나, 남대문 밖에 이르러서 액사(縊死)를 당하였사오며, 오후에 무안군광화문으로 나오는 것을 명하사 통진(通津)으로 귀양보냈고, 해질 무렵에 흥안군 이제(李濟)가 서문으로 나오는 것을, 군사들이 그 집 앞까지 뒤쫓아 가서 목을 베고 말았습니다. 태종께서 이를 들으시고 놀라면서 말씀하시기를, ‘살려 두어도 괜찮을 것을. 살아 있어도 해될 것은 없는데.’ 하고, 즉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흥안군이 죽었다. 노비들이 다 흩어져 도망할 것이니, 네가 갑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시체를 거두어 염(斂)하고, 노비가 흩어지지 못하도록 하고 이르기를, 「만약 흩어져 가는 자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고, 옹주(翁主)에게는, 「놀라지 말라.」고 이르도록 하라.’ 하옵시기에, 신이 이에 모두 명하신 바와 같이 하고, 여자종을 시켜 명을 전달하기를, ‘나는 정안군의 도진무(道鎭撫)이다. 정안군께서 흥안군의 죽음을 들으시고, 나에게 명하시어 시체를 거두어 염하게 하시고, 옹주로 하여금 놀라지 말도록 하게 하라고 하셨다. ’고 하였더니, 옹주는 이를 들으시고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무안군양화도(楊花渡)를 지날 무렵에 피살되었사온데, 태종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고 역시 놀라며 애도하며 마지않으셨으니, 무안군흥안군의 죽음은 모두 태종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김돈전흥의 말하는 바를 그대로 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이제 전흥의 말씀은 단지 그 줄거리로서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전흥이 비록 태종을 수종하였사오나 본래 그 신분이 미천하였사오니, 어찌 그 계모(計謀)에 참예하여 그 사실을 알겠습니까. 무인·경진의 일을 아는 자로서는 이숙번(李叔蕃)만한 사람이 없사온데, 다만 숙번이 먼 지방으로 귀양가 있사오니, 사람을 시켜 가서 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에 다시 김돈에게 묻기를,
“여러 대신들과 상의한 바, 모두들, ‘사람을 시켜 묻는 것이 옳다. ’고 하고, 신개(申槪)는 이르기를, ‘데리고 와서 묻는 것이 옳다. ’고 하는데, 네 생각에는 어떠냐.”
하니, 김돈이 대답하기를,
이숙번태종께 득죄한 사람이므로, 서울에는 들어올 수 없는 몸이오니, 춘추(春秋)의 직임을 겸한 영오(穎悟)한 사람을 택해 보내어 적소(謫所)로 가서 물어 보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어 보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서울로 오게 하여, 혹 친히 묻기도 하고, 혹은 너희들이 가서 물을 것 같으면,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시켜서 가서 물었다가 혹시 미진한 것이 있게 되면 어찌 또 사람을 보내어 묻는단 말인가.”
하고, 숙번의 죄명(罪名)을 기록하여 올리게 하고, 즉시 지인(知印) 김직손(金稷孫)을 보내어 숙번을 부르고, 인하여 교지하기를,
숙번이 비록 죄는 범하였으나 나이 이미 늙었으니, 역마(驛馬)와 찬품(饌品)의 공궤 등을 네가 살피고 보호하여 노상에서 병이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164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註 2894]이제(李濟) : 태조의 사위. 경순 옹주(慶順翁主)의 남편.

[註 2895]이방석(李芳碩) : 태조의 여덟째 아들.

[註 2896]무안군(撫安君) : 이방번(李芳蕃). 태조의 일곱째 아들.

[註 2897]익안군(益安君) : 이방의(李芳毅). 태조의 셋째 아들.





[註 2902]회안(懷安) : 이방간(李芳幹). 태조의 넷째 아들.

[註 2903]상당(上黨) : 이백경(李伯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