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위 기록분

신구 안동김씨

조전 2011. 10. 16. 08:42

靖國君 할배의 어머님[母]께서는 舊 安東金氏이다.

유명한 안동김씨는 本貫이 같이 불리어 지지만 실제로는 祖上이 전혀 다른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김씨로 나누어지며 우리와 깊은 인연을 가진 쪽은 구 안동김씨이다.

가. 구 안동김씨

平章事 김숙승[金淑承][敬順王의 孫子]를 始祖로 高麗朝에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추앙받았던  6代孫 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을 中祖로 모시고 있다. 충렬공은 안동에서 출생하여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고 麗.元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日本本土를 원정한 후 최고 관직인 추충정난정원공신 벽상삼한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 壁上三韓 匡靖大夫 三重大匡 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한 후 가자[加資]되어 첨의령[僉議令]에 이르러 상락군 개국공[上洛郡 開國公]에 봉해져 현재의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서거 후에는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宣忠協謨 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의 시호를 받았다. 이러한 위대한 장군의 外姑孫子가 바로 우리 靖國君 할배이다. 정국군의 外曾祖父는 문영공[文英公] 순[恂]이며 外祖父는 상서공[尙書公]永字暉字이신데 判三司公派로서 자손이 번성하지 못해 현재 全國에 겨우 90여명 밖에 없다고 전한다. 구안동김씨에서 가장 번성한 파로는 정국군의 外從祖父인 정간공[貞簡公] 영후[永煦]의 자손으로서 그의 孫子代[靖國君 外6촌]에  안렴사공[按廉使公] 사렴[士廉: 현재 10만여명]]과 翼元公 사형[士衡: 현재 20여만명]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다. 兄인 사렴은 이조 개창에 반대하여 淸州에 은거하여 평생 동안 한양 쪽은 처다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편 동생 사형은 李成桂를 추대 開國 1等功臣에 올라 左議政을 지냈으며 제1차 왕자의 난에는 이방원을 도와 定社功臣1等으로 太宗 때 左議政에 복직되어 上洛府院君이 되었다.

한 가지 특별한 사실은 태조5년[1396년]에 右議政으로 오도병마도처치사가 되어 對馬島를 원정하여  대마도주로부터 조공을 약속받고 개선하였다고 이조실록에 전하는데 특별한 전공이 없어 학자들 사이에는 반신반의하는 실정이다. 사실이라면 정국군과 외6촌인 김사형이 8년 사이에 대마도를 정벌한 관계가 된다. 필자가 몇 해 전 대마도에 갔을 때도 정국군에 이어 2번째로 대마도를 정벌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李朝에서 김사형의 자손들[익원공파]은 승승장구하여 4명의 政丞, 5명의 淸白吏, 2명의 忠武公을 배출하여 모름지기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를 지켜왔다. 그러나 김사형의 후손인 김자점[金自點]은 西人 성혼의 門人으로 仁祖反正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1等에 훈록되어 西人이 功西派[功臣勢力]와 淸西派[非功臣 觀望派]으로 갈릴 때 공서파로서 청서파의 後述하는 新安東金氏의 金尙憲 등을 공격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領議政에 까지 올랐으나 또다시 그가 속하였던 공서파가 洛黨과 原黨으로 분열되어 낙당의 영수로서 원당의 영수 元斗杓와의 정권쟁탈전에서 패배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이로서 政局의 주도권은 송시열, 김상헌, 송준길 등[淸西派의 山黨]으로 넘어갔고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들은 폐족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族譜와 조상의 문적까지도 불태워버려 이후 구안동김씨들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주석으로 평생토록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배출되어 門名을 크게 빛냈다.

따라서 李朝 中期 때 까지만 하더라도 안동김씨라고 하면 의당 구안동김씨를 일컬었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뒤이어 興起한 신인동김씨를  안동김씨로 부르는 형편이다.


나. 新[後]安東金氏

 시조 金宣平은 원래 慶州 金氏였으나 新羅 末 景哀王때 고창군(古昌郡: 현 안동)의 성주(城主)로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에 권행(權幸:안동권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안동장씨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으고 王建을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을 토벌하여 병산대첩(甁山大捷)의 전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세분[三太師라고 부른다]에게 각각 本貫을 안동으로 賜姓을 내려 김선평에게는 경주김씨에서 안동김씨로, 김행은 안동 권씨로 장정필에게는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게 하였다.

이리하여 신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에 도정[都正]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中祖로 하고 있으며 인조 때 김극효의 아들로서 우의정을 지낸 선원 김상용과 좌의정을 지낸 청음 김상헌 형제가 나타남으로써  가문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후 300년 동안 15명의 政丞과 6명의 大提學, 1명의 淸白吏 3명의 王妃를 배출하였다.

특히 正祖大王의 유명을 받았던 金祖淳의 딸이 純祖妃가 됨으로써 정권을 독점하여 세도정치를 편 관계로 조선 망국의 원성을 싸게 되었다. 그들이 살았던 곳이 서울의 자하동이었는데 발음이 변해 흔히 장동 김씨로도 불리워졌으며 흔히 이 안동김씨를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3斗)”이라고 말한다. 관자는 조선조 때 정 3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의 망건줄에 달던 옥(玉)과 금고리를 뜻하는 것으로 안동김씨는 그만큼 많은 현관(顯官)을 배출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는 이렇게 본관과 성씨가 같으면서도 始祖를 달리하는 두 안동 김씨가 함께 살고 있다. 선안동 김씨의 종가는 삼소재이고  후안동 김씨의 종가는 양소당이다.

이처럼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는 그 시조를 달리하기 때문에 서로 일가[一家]는 아니며 通婚을 하였고 지금도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다.


다. 光山金氏 禮安派에서 구안동김씨 중조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찾아준 이야기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묘는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9월]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촌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간에 약100여년간 失傳되어 왔었다. 이곳에는 광산김씨 예안파[파조 金天利 公: 靖國君의 매제? 또는 매형] 예안 入鄕祖인 농수 金孝盧 公[派祖 김천리공의 玄孫]의 묘소가 있어 후손들이 제를 지내 왔다. 그런데 광산 김씨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수를 진설해 놓으면 난데없는 회오리 바람이 제수를 날려버려 고심을 많이 하였는데 김효로 공 묘소의 아래에 묵묘 한 기가 있었는데 이 묵묘에 간단한 제수를 차려주었더니 회오리 바람이 불지않아 계속 그렇게 시행을 해 왔었다.  이후 宣祖27년[1594년]에  김효로 공의 증손자 近始齋 金垓 公[임란 때 영남좌도 의병장]의 묘소를 부근에 세우고자 묘터를 파든 중 그동안 실전되었던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이 발견되어 그동안 잃어버렸던 충렬공의 묘를 찾게 되었다.

현재도 광산 김씨들은 김효로 공의 제를 지낼 때는 김방경 장군의 묘에 먼저 제를 올린다고 한다. 김효로 공은 김방경 장군의 7代 外孫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로 두 門中간의 아름다운 유대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광산 김씨 예안파와 구 안동 김씨 양 문중은 우리 정국군파와는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음으로 자세히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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